1933년 권력을 손에 넣은 히틀러는 바이에른의 고요한 오버잘츠부르크 구역에 위치한 그의 산속 별장을 거대한 저택으로 개조하고 베르그호프라 이름 붙였다. 나치 고위 간부들이 그 지역으로 몰려들었고, 히틀러의 베르그호프는 제3제국의 위상을 과시하는 상징이 되었다. 히틀러의 신뢰를 한몸에 받던 보좌관 마르틴 보어만의 도움으로, 오버잘츠부르크는 이내 히틀러의 요새화된 개인 장원으로 탈바꿈했다. 베르그호프에는 2,000명의 친위대 병력이 주둔했으며, 최첨단 보안 시스템으로 보호받았다. 한편 보어만은 베르그호프 위 해발 1800미터에 달하는 켈슈타인산 봉우리에 히틀러의 손님과 외교관을 접대하기 위한 호화 별장, 독수리 요새를 건설했다. 안전한 오버잘츠부르크에서 히틀러의 자만심은 끝을 모르고 부풀어 올랐고, 히틀러는 점점 현실과 동떨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숨 막힐 듯 아름다운 풍경으로 둘러싸인 베르그호프에서 그는 역사상 가장 추악한 계획을 지휘했다. 하지만 히틀러의 패색이 짙어지고 연합군 폭격기의 작전 반경이 넓어지면서, 오버잘츠부르크도 더는 안전하지 않게 되었다. 이에 보어만은 오버잘츠부르크 주변의 방어 태세를 강화할 뿐만 아니라 지하 깊은 곳으로 파고 들어갔다. 주변 산봉우리에는 대공포가 설치되었고, 오버잘츠부르크 지하에는 미궁처럼 얽힌 8킬로미터 길이의 벙커와 터널이 건설되어 베르그호프와 나치 핵심 간부들의 집을 연결하였다. 그리고 그 지하 시설은 공격을 받더라도 히틀러가 국정을 운영할 준비가 전부 갖춰져 있었다. 하지만 전쟁의 마지막 6개월 동안, 히틀러는 오버잘츠부르크의 안전한 피난처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다. 붉은 군대가 베를린을 향해 다가오고 있을 때, 히틀러는 그곳에 있는 자신의 벙커에 틀어박혀 있었다. 자신의 안전한 산속 별장으로 피신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1945년 4월 25일, 영국 왕립 공군의 폭격을 받은 오버잘츠부르크는 초토화되었지만, 벙커에 있던 이들은 대부분 무사히 살아남았다. 오늘날까지 독수리 둥지는 온전히 살아남아 한때 오버잘츠부르크에 얼마나 큰 권력이 집중되었었는지 보여주고 있다.